작가 제이미리 (Jamie M. Lee)는 항상 떠나고 있지만, 언제나 머무르고 있다. 미국 서부에서 시작된 작가의 작품 활동은 클레어몬트의 MFA졸업과 함께 미 동부와 남부를 가로지르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다양한 전시, 레지던시, 프로젝트로 계속 이어져 왔다. 작가는 주어진 환경과 그로인한 심상을 작품안에 솔직하게 담아내고 그것이 끝나면 또 다른 영감을 찾아 낯선 곳으로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시의 한 소절과 같은 작품의 제목을 보면 작가가 어디에 머물렀는지, 어떤 마음상태를 가지고 지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작은 힌트를 가지고 작품을 바라보고 있으면 작가의 마음이 머물렀던 곳에 닿을 수 있다.

제이미리는 2000년대 중반부터 다양한 재료들을 화면안에 포용하기 시작했다. 기미한 직물용 염료의 색이 패널 위에 입혀졌고, 에어브러쉬가 더욱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을 주었다. 종이, 글리터, 젤 들이 화면위에 장식하듯 수 놓아져 리듬이 있는 발랄한 이미지들을 만들어 냈다. 젊음의 기운이 가득한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과 푸른 바다, 청량한 바람속에 머물던 작가의 초기 작업은 원색이 충돌하는 화면속에 순수함과 자유로움으로 가득하다. Cooper Union 레지던지 참여를 계기로 뉴욕에 머물게 되면서 2000년 후반까지 더 과감한 직선과 이에 상반되는 유기적인 형태를 통해 화면을 집중/확산 시켰다. 뉴욕에서의 작업들은 일면 명도와 채도가 낮아지면서 세련된 그리드나 섬세하게 구축 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아카데미를 떠나온 작가가 뉴욕 예술계에 프로작가로 입문하며 행한 시도들과 이를 잘 안착시키려 번민하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동시에, 미술시장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느꼈을 행복과 만족감 또한 작품에 뭍어있다. “별”과 같이 미국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노골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거침이 없고 과감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기대와 설렘이 컸던 한국 활동은 2014년 개인전을 통해 한국에서의 대표적인 작업들이 신작으로 발표되면서 활발해졌다. “Dreamscape시리즈”를 비롯해, 이 시기의 작업들에는 화면에 어느 것 하나 튀지않고, 차고 넘침이 없다. 캔버스 전체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됐고, 흘러내린 페인트자욱, 작가의 손길이 느껴지는 붓자국이 편안하다. 깊이의 끝을 알수 없이 색감이 심연하고, 화면을 가득채운 형태화 구조는 각자의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제이미리의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한 무의식에 연결 되어있다. 다이어리를 적어내려가듯 쓴 작가의 노트는 어떤 평문보다 제이미리의 작업을 이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안내서이기도 하다.

“미국 산타페의 사막 한가운데서 마주친 첫눈의 신비스러움과 설레임, 오랜 시간 가족과 집을 떠나 떠돌아 다니던 오랜 그리움,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음악으로 떠 오르는 잊고 지낸 추억, 쏟아지는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던 찰라, 그 소원들이 이루어진 순간의 환희와 기쁨, 어린 시절 즐거웠던 시간과 함께 떠 오르는 내 손에 쥐어져 있던 분홍 솜사탕의 달콤함, 구름처럼 하늘에 떠 다니던 4월의 벚꽃, 어느 가을 끝자락에서 맞이한 풍경. 이런 나의 사소한 일상들은 나의 작업의 소재로서 특정한 시간에 멈춰진 기억과 나만의 감각을 추상적 이미지로 종이와 캔버스에 담아진다.”

제이미리는 2차원 공간의 환영에 머무르지 않고, 2012년부터 캔버스 콜라쥬를 발전시켜 Hand-cut paper 인스톨레이션을 작업, 전시 해왔다. 섬세한 노동 집약 활동으로 탄생한 종이꽃들은 제한된 공간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작품”이라는 의미의 한계가 재료를 이용해 만든 물질적인 완성을 의미함은 물론, 제작하는 과정, 관객의 경험, 그리고 작품이 만들어내는 환경적인 변화까지 포용 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종이의 집합이 매달려 떨어지다가 또다시 부유하는 모습은 제이미리가 자연의 한 가운데서 맞딱뜨린 한여름 소나기의 강한 빗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사이로 관객이 걸어다니며 직접 그 경이로움을 느껴보기를 권유하고 있다.

인간은 머물렀던 공간에 자기의 흔적을 남기거나, 그 공간에서의 기억을 간직하고자 무언가를 수집하려고 한다. 시간과 공간, 그 안에 머물렀던 기억이 각인된 제이미리의 작업은 그러한 본능을 철저히 따른 작가만의 유니크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다. 작가가 끊임없이 새롭게 시도하고 연구 해온 재료의 물성 또한 똑같은 작품이 존재 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그러나 동시에 제이미리는 인간에게 가장 익숙한 유기적인 형태를 가지고 아름다운 시각적인 언어를 만들어 자신이 머물렀던 각각의 마음의 서식지로 관객을 안내하고 있다.

정 미 성 (전시기획/ ARTMARKT.ASIA)